시노사키판 소설 3권 - 하늘과 땅과


1

[들어가기에 앞서.

무릇 역사란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것으로,
그 수는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수와 같다.
흡사 사람의 정의가 사람의 수만큼 존재함과 같은 이치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그것은 각자가 판단할 몫으로 남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시 일어난 일과 그 정황에 무지한 채로 마땅한 판단을 할 수는 없을 것이라 사료되는 바.
제국의 탄생으로 말미암은 그란벨 왕국과 인근 공국의 붕괴.
그리고 제국의 붕괴에 따른 망국의 부흥.
그들의 성전은 뭇 나라가 올바르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돕기 위해 본인은 몇 권의 기록을 남겼는데,
이 책은 그중 하나로 트라키아 왕국에 관하여 저술하였다.
여러분이 오랜 시간에 걸쳐 분열과 통합을 경험한 트라키아의 참모습을 읽고 알아준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란벨 왕국 궁정사제, 사이어스의 저서에서.]


2

“적이지만 제법 좋은 위치에 요새를 세웠군.”

트라키아 반도 북쪽, 신축 요새를 둘러싼 평원에서 노바는 휘하 기마대를 정지시켰다.
요새 앞에는 로프토 제국의 대군이 그녀를 맞이하고 있다.
보랏빛 반다나로 감싼 밤색 머리를 어깻죽지에 정돈한 여전사는 상쾌한 눈동자로 요새를 내려다보았다.
렌스터 요새.
진홍빛 경갑을 입고 오른손에 지창 게이볼그를 들고 있는 늠름한 모습은 성전사라 불리기에 가히 부족함이 없었다.

“노바 공, 여기선 다인 공의 부대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지 않겠습니까?”

부대에 동행한 청년이 차분하게 말했다.
부드러운 은발과 따뜻하게 빛나는 눈동자, 사람을 끌어당기는 아름다움과 상냥한 성품을 고루 갖춘 미남이다.
몸에 걸친 사제복은 흰색과 자주색으로 염색되어 있으며, 손에는 성장聖杖 발키리가 들려 있다.
이 사내야말로 노바와 같은 성전사, 대사제 브라기이다.

“네. 하지만 오빠는 발드 공의 기마대와 함께 남쪽 트라키아를 공략하고 있을 거예요. 이제와서 시기를 맞출 순 없겠죠. 오빠에게 지지 않겠다고 길을 서두른 게 독이 되었군요.”

노바는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다나 요새의 기적 이후, 해방군은 신의 힘을 내세운 열두 성전사를 기치로 하여 연승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번은 와해되었던 전력도 사람들의 희망이 살아남과 함께 재집결하여 각 성전사 아래 군대로서의 진용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허나 조직의 규모가 왕성해지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중 제일가는 것이 많은 병사를 부양하기 위한 식량과 싸우기 위한 무기의 확보였다.
다나를 기점으로 북쪽 피놀라 지방, 뤼벡 지방으로 세력 범위를 점차 확대시킨 해방군이었다. 하지만 보급 거점이 없는 군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성자 헤임의 의견에 따라 트라키아 반도의 확보가 계획된 것이다.
풍부한 곡창지대를 보유한 북트라키아 지방과 질좋은 광석이 채굴되는 남트라키아 지방은 아직 로프토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 지역을 빼앗을 수만 있다면 해방군의 유지력을 굳게 다질 수 있으며 동시에 제국의 힘을 크게 낮출 수 있었다.
그 선봉장으로 다인과 노바를 중심으로 한 부대가 남하해 트라키아 반도에서 대륙으로 통하는 현관–멜겐 지방을 점령하게 되었지만, 제국은 육로가 막히자 해로를 통해 물자를 계속 수송하고 있었다. 이에 맞춰 해방군은 부대를 다시 둘로 나눈다.
노바의 부대는 얼스터 지방을 거쳐 제국의 거점이 위치한 렌스터로, 다인의 부대는 루테키아 지방을 거쳐 제국의 항구를 점령, 북상하여 먼스터 지방을 경유해 렌스터에서 제국군을 협공하는 계획이었다.
첫 전투의 승리에 고조된 노바는 타고난 지휘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해 순식간에 얼스터 요새를 함락, 예정보다 훨씬 이르게 렌스터 요새에 당도하고 말았다.
당초 제국군이 북트라키아 병력을 렌스터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노바가 이를 깨닫는 것은 훗날의 일이다.
더욱이 제국의 전력은 나날이 증대되고 있었는데, 짐작컨대 바닷길을 통해 군사가 공급되고 있었을 것이다. 해방군에서 본 전투가 제국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한 만큼, 제국 또한 이 싸움이 해방군을 각개격파할 절호의 기회로 본 것이리라.

“어찌됐든 제국이 우리 사정을 봐주진 않겠죠. 여기서 오빠와 발드 공을 기다린다 해도 그때까지 교전을 피하진 못할 거예요.”

“맞습니다. 이미 다나에 있는 오드 공에게도 원군을 요청하는 전갈을 보냈으니, 우선 방어에 전념하며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시간벌이는 본의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네요.”

노바는 브라기의 지략에 감사하며 미소지었다. 인심과 상황을 두루 파악하여 항상 선수를 쳐주는 이 사내가 있기에 그녀도 마음껏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잠시 여성스러움이 비쳤던 노바의 얼굴이 순식간에 전사의 것으로 변했다. 브라기가 그 시선을 따라가니, 벌써 적군이 이동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전투가 그들의 생각보다도 빠르게 벌어지려는 모양새였다.

“전원 기승, 방어 진형을 취하라!”

재빨리 애마에 올라타며 부하 기사들을 향해 외친다.
게이볼그를 하늘 높이 세우고, 어느새 노바는 선두에서 달려나가고 있었다.

"용사들이여, 성전사를 따르라! 게이볼그와 발키리 앞에 두려울 것은 없다!"

발키리를 들고 브라기가 병사들을 고무시켰다. 병사들 또한 일제히 함성으로 화답하고, 기사들은 약속된 진형을 형성했다. 브라기는 비전투부대를 뒤로 물리는 동시에 궁병대를 이끌고 엄호 포진을 취했다.
적 기마대의 선봉장이 천둥소리처럼 대지를 짓밟으며 다가온다. 노바는 정면으로 응수하는 듯했으나, 접촉 직전에 부대가 좌우로 갈라졌다. 진법이 통했음에 으쓱해함과 동시에 궁병대를 시켜 화살을 퍼붓는다. 잠시 지휘가 마비된 제국군을 좌우로 협공하고 궁병대는 재빠르게 후방으로 이탈했다. 서로를 믿기에 할 수 있는 절묘한 호흡이었다.
협공을 당한 제국군은 곧장 전진하여 혼전으로 이어가려 했다. 이미 멀어진 궁병대를 무리해서 쫓느니, 차라리 혼전으로 몰고 가 활 세례가 불가능한 상황을 형성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후방에서 쳐들어오는 기마대의 공격에 놓이게 된다. 노바는 산개한 부대의 반절을 우회시켜 적 부대의 후방에 집결시킨 것이다.

“제국에 빌붙는 사악한 자들이여, 내 창의 이슬로 사라져라!”

삼면에서 포위댄 적부대로 노바가 앞장서 뛰어들었다.
게이볼그를 무자비하게 휘두르며 지나간 곳에 선혈이 낭자하는 그 모습에 제국 병사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고, 노바의 뒤를 따른 기사들이 그것을 추격했다.
초전은 해방군의 압승이었다. 하지만 제국군의 선봉을 채 섬멸시키지도 못한 채 두 번째 군세가 해방군을 덮쳐왔다. 적은 원정으로 지친 해방군을 물량으로 말려죽이려는 듯했고, 그 전술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효과를 발휘해 나갔다. 2교대로 군사를 돌리는 제국군을 상대로 해방군에게 쉴 틈이라곤 주어지지 않았다. 노바는 여러 차례 부대를 재집결하여 각개격파를 미연에 막음과 동시에 과감한 전투를 이어나갔으나, 아무리 노바라도 언제까지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대로 퇴각할 것인지 전멸할 것인지의 기로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적어도 원군이 올 때까진…”

노바는 심호흡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몇 번째인지조차 생각나지 않는 적의 공격을 또 한 번 격퇴한 직후의 찰나 같은 휴식이었다. 그 눈동자에 흡사 새처럼 보이는 무리가 비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가?

“저건 뭐지? 적의 신무기인가!?”

그 물체가 적어도 새는 아니라고 판단한 노바는 게이볼그를 치켜들었다.

“성전사님, 또 적이 오고 있습니다!”

기사 중 한 명이 외쳤다. 옷을 적신 피가 누구의 것인지도 알지 못하는 목소리는 한계까지 쉬어 있어, 그 비통함이 이루 비할 데가 없었다. 렌스터 요새 방향에서 충분한 휴식을 갖춘 적의 다음 부대가 진군해 왔다.

"여기까진가…"

그녀는 이를 악물고 결단했다. 여기서 전멸할 수는 없지 없다.

"싸울 수 있는 자는 나를 따르라! 브라기 공과 함께 멜겐으로 후퇴하여, 오드 공의 부대와 합류한다!"

그 말과 함께 노바는 게이볼그와 함께 적진으로 달려들고, 힘이 남아 있던 기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새 같은 무리가 제국군을 덮쳤다. 낙하하며 가속된 투척창이 제국군의 몸을 꿰뚫어 간다.

"아군인가!?"

당황하는 노바의 앞에 그중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그것은 털이 없는 날개와 비늘로 덮인 몸, 긴 목이 특징으로 꼽히는 생물로, 이름은 비룡이라고 한다. 그 등에는 한 청년의 모습이 있었다. 붉은 반다나로 앞머리를 누르고, 긴 머리는 등을 타고 멋대로 풀어헤쳐져 있다. 두 눈은 마주한 상대에게 긴장을 강요하는 빛을 뽐내고 있었다.

"오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노바는 외쳤다.

"뭘 고전하고 있는 게냐. 너답지 않게."

그리 말하며 다인은 노바의 창과 짝을 이루는 천창 궁니르의 날을 빛내고, 등 뒤에는 용기사들이 적을 물리치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 같이 펼쳐져 있었다.

"실력 있는 전사들이지? 트라키아에 서식하는 비룡들을 길들여 타고 다니는 부족이다. 자식들을 로프토의 손아귀에서 구해주니 동료가 돼줬지."

조금은 자랑스러운 듯 다인이 말했다. 스스로도 비룡을 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그들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새였다. 어찌됐든 다인은 남트라키아 제국군을 무찌른 기세를 타고 단숨에 북쪽으로 달려왔다. 노바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오산이었다.

"궁니르가 어서 형제와 함께 싸우고 싶다고 투덜대더군. 과연 좋은 때에 도착한 듯하다. 자, 게이볼그를 들어라! 싸움은 지금부터다!"

"네, 오빠!"

노바는 게이볼그를 들어 화답했다. 두 창의 날이 마주쳐 상쾌한 소리를 전장에 울리니, 성스러운 빛이 노바와 다인의 몸을 감쌌다. 동시에 아군에게선 감탄이, 적에게선 두려움이 터져나오는 듯했다.

"우리의 성스러운 창을 막아설 적은 없으리라! 용감한 겨레의 전사들이여, 뒤를 따르라!"

다인과 노바가 일심동체로 호언장담하며 렌스터 요새를 향해 달려나가고, 기운을 되찾은 해방군 또한 함성과 함께 그들을 뒤따랐다.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해방군을 상대로 제국군은 순식간에 밀려났다.
하늘과 땅, 두 방향에서 공격해 오는 해방군에게 제국군은 경험해본 적도 없는 싸움법을 강요당해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뿐이었다. 렌스터 요새 위에 선 노바는 게이볼그를 치켜들고, 찬란하게 빛나는 지창을 보며 다인 또한 궁니르를 치켜들었다.
렌스터 요새는 해방군의 손에 함락되었다.
다인과 노바는 이날 트라키아 반도, 그들의 운명이 머물 땅에 다다른 것이었다.